성희롱·성추행·성폭행의 판단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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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희롱·성추행·성폭행의 판단 기준

‥ 자유게시판

by 토파니 2020. 2. 24.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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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교사가 교장에게 술을 따르는 건 미덕? 〈사례 1〉

A초등학교 3학년 교사들은 회식에 교장과 교감 고지식(가명)씨를 초대했다. 회식 자리에는 여교사 3명을 포함해 총 9명이 함께하게 됐다. 술병을 건네받은 교장은 여자 교사들에겐 소주잔에 맥주를, 남자 교사들에게는 소주를 따라 주었다. 3학년 부장교사가 건배를 제의하자 남자들은 잔을 비웠으나 여교사들은 입술만 댄 채 잔을 내려놓았다.

그때였다. "여선생님들, 잔 비우고 교장 선생님께 한 잔씩 따라 드리세요." 교감 고씨는 여교사들을 재촉했다. 눈치를 보던 남교사들이 한 명씩 교장에게 술을 권했으나 여교사들은 술잔을 비우지 않았다. 고씨는 또다시 "여선생님들 한 잔씩 따라 드리지 않고"라고 채근했다.

이에 여교사 2명은 마지못해 교장에게 술을 따르게 됐다.

술을 따르지 않은 나머지 여교사 한 명이 성희롱을 당했다며 진정을 냈다. 여성부 남녀차별개선위원회(현재는 업무가 국가인권위원회로 이관)는 "여교사에게 술을 따르라고 한 교감의 행위는 성희롱"이라고 결정했다.

그러자 고 교감은 "술을 받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답례로 술을 권하는 것은 예의 아니냐"고 반발하며 행정소송을 냈다. 법원의 성희롱 판단 기준을 살펴보자.

어떠한 행위가 성희롱에 해당하는지 여부는 쌍방 당사자의 연령이나 관계, 장소 및 상황, 성적 동기나 의도의 유무, 행위에 대한 상대방의 명시적 또는 추정적인 반응의 내용, 행위의 내용 및 정도, 행위가 일회적 또는 단기간의 것인지 아니면 계속적인 것인지 여부 등의 구체적 사정을 종합해, 그것이 사회공동체의 건전한 상식과 관행에 비추어 볼 때 용인될 수 있는 정도의 것인지 여부, 즉 선량한 풍속 또는 사회질서에 위반되는 것인지 여부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 (대법원 1998. 2. 10. 선고 95다39533 판결 등)

이어지는 법원의 설명이다. "성희롱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행위자에게 반드시 성적 동기나 의도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상대방이 성적 굴욕감이나 혐오감을 느꼈다는 이유만으로 성희롱이 성립될 수는 없다." 즉, 성희롱은 "일반적이고도 평균적인 사람"의 시각으로 봐야지 주관적인 기준만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 법원의 판례다. (서울고등법원 2005. 5. 26. 선고 2004누4286 판결, 대법원 2007. 6. 14. 선고 2005두6461 판결)

법원은 고 교감의 발언에 대해 "여자 교사들이 (유흥 또는 주흥을 위해) 교장에게 술을 따라야 한다는 성적 의도보다는 술을 받았으면 상사에게 술을 권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한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또한 두 명의 여교사가 불쾌하게는 생각했으나 성적 굴욕감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고 진술한 점 등을 들어 선량한 풍속 또는 사회질서에 위반되는 행위로 보기 어렵다면서 성희롱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대법원까지 같은 결론을 내자 여성단체는 "법원이 성희롱의 객관적 기준만을 강조한 나머지 피해자의 감정을 외면했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술잔을 돌리고 술을 주고받는 게 직장생활에서 미덕인 것까지는 좋다.

그런데 그 미덕이 강요라면 좀 곤란하지 않을까. 고 교감의 행동이 성희롱까지는 아니었더라도 '선량한 풍속'으로 권장할 만한 일이 아닌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어쨌거나 대법원의 입장을 정리해 본다. 성희롱은 (당사자의 감정이 아닌) 객관적인 시각으로 판단해야 한다. 그래서 성적 굴욕감이나 혐오감을 느꼈다면 행위자에게 성적 의도가 없었더라도 성희롱이 될 수 있다. 다음에 나오는 내용이 그런 사례다.

40대 남교수가 30대 여직원에게 "가슴 닫으라"고 했다면 〈사례 2〉

B대학교는 학교 쪽과 직원노동조합 사이의 의견 차이로 단체교섭이 결렬됐다. 노조는 조합원 찬반 투표를 거쳐 전면파업에 돌입했다. 노조원들은 허맹구(가명) 학생처장을 비롯한 보직 교수들이 식당에서 파업 대책을 논의한다는 소식을 듣고 항의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학생처장 허씨는 노조원들과 언쟁 중 충격적인 발언을 했다. 노조원 중에 라운드 티셔츠를 입은 여직원을 향해 "가슴이 보이니까 닫아요", "아니, 보는 게 아니라 나 같은 늙은 사람들이 거기 신경 쓰고"라고 한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여직원은 수치심에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이 발언을 성희롱으로 규정하고 허씨에게는 특별인권교육 수강을, 학교 측에게는 허씨에 대한 경고조치를 권고하는 시정명령을 통지했다.

사건은 다시 법원으로 넘어왔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허씨는 "공개된 장소에서 우발적으로 본 모습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고,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라는 취지의 발언이었다"고 항변했지만 법원은 이렇게 답했다.

"48세의 남성인 보직 교수가 36세 여성을 향해 가슴이 보인다고 말한 것은 객관적으로 성적 굴욕감을 느끼게 한 성희롱이고, 따라서 인권위의 시정통지는 적법하다." (서울행정법원 2007. 12. 21. 선고 2007구합22955 판결, 서울고등법원 2008. 8. 21. 선고 2008누2707판결, 대법원 2009. 4. 9. 2008두16070 판결)

허씨는 설령 성적 동기나 의도 없이 그런 말을 했을지 몰라도 당시 정황에 비춰 보면 성희롱에 해당한다.

〈사례 3〉

C은행 지점장인 돈주황(가명)씨는 지점에서 왕으로 군림했다. 여직원들을 마치 시녀 대하듯 했다. 특히 회식 자리에서 그의 진가(?)는 여지없이 드러났다. 여직원과 서로 목을 껴안는 과도한 '러브샷'은 기본이고 "처녀와 마시니 술맛이 다르네", "나도 30대 애인이 있었으면 좋겠다"와 같은 추임새는 덤이었다. 게다가 인사이동을 희망하는 여직원에게는 "키스를 할 수 있겠느냐"고 되물었고, 심지어는 용역 업체 여직원의 몸을 더듬기까지 했다. 노래방에서는 마음에 드는 여직원과 블루스를 추거나 강제로 입을 맞추기도 했다.

돈씨의 왕 노릇은 오래 가지 못했다. 누군가 익명으로 제보하는 바람에 본사에서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됐고, 은행은 인사위원회를 열어 정직 6월의 징계를 내렸다.

돈씨는 30년간 성실히 근무한 점 등을 감안하면 징계가 너무 가혹하다며 법원을 찾았다. 법원은 "직원을 보호할 의무가 있는 지점장이 자신의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성희롱을 함으로써 직원들의 근로 의욕을 저하시키고 은행의 명예를 실추시킨 점을 고려할 때 징계 수위가 결코 무겁다고 볼 수 없다"며 원고 패소 판결했다. (서울중앙지법 2008. 12. 4. 선고 2007가합114098 판결, 서울고등법원 2009. 9. 11. 선고 2009나1681 판결, 대법원 2009. 12. 24. 선고 2009다79668 판결) 돈씨의 사례야말로 자신의 지위를 이용한 전형적인 직장 성희롱이었다. 하지만 정직 처분 정도로 끝낼 가벼운 사안이 아니다. 형법상 강제추행에 해당되어 형사처벌 감이다. 법원이 좀 더 적극적인 판단을 할 수는 없었을까.

법원은 징계처분이 적정한지를 판단할 뿐 판결로 직접 징계 수위를 정할 수는 없다. 자신의 징계가 부당하다며 낸 징계무효 소송에서 법원은 원고 승소, 패소 판결밖에 할 수 없다. 형사처벌도 마찬가지다. 강제추행은 피해자의 고소가 있어야만 죄를 물을 수 있는 친고죄이므로 고소가 있기 전에는 수사기관이나 법원도 아무런 조치를 취할 수 없다.

여기에는 아직도 성희롱 신고를 반기지 않는 사회 분위기도 한몫하고 있다. 법에서는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나 피해 발생을 주장하는 근로자에게 해고나 인사상 불리한 조치를 할 수 없다"고 못 박고 있지만, 선뜻 성희롱이나 성폭력 신고를 하기가 쉽지 않다. 성희롱 없는 건전 명랑 사회, 아직도 갈 길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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